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경, 저는 퇴직하신 학창시절의 은사님을 뵈러 친구와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침몰 소식은 도로 위 라디오를 통해 듣게 되었지만 선생님을 만나고 식당에 들어섰을 때, 정부의 빠른 대처와 해경의 노력으로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안도하는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저녁 무렵 숙소에 들어와 TV를 켰는데 생존자들을 구조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분명 전원 구조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또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이후 구조에 대한 어떠한 진척도 없이 바다에 떠 있는 세월호의 모습은 며칠 동안 마치 재방송처럼 되풀이 되었고, 국민들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컨트롤 타워도, 구조에 대한 의지도 없음을…
2017년 4월, 목포신항에 있는 세월호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시기였고 아직 미수습된 9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였습니다. 미수습자 가족들이 그토록 유가족이 되고 싶어 했을 그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집니다. 바닷속 3년의 시간이 뭍으로 드러난 세월호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참혹하고 공허했습니다. 생사여부도 아니고 죽음을 확인하는 것조차도, 그것도 부모가 자식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조차도 정부는 일관되게 잔인했으며 한결같이 무책임했습니다.
피해자가 그 피해에서 회복되기 위해서는 피해인정과 보상,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는가에 대한 규명, 공감의 기회, 그리고 정의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충족되어야만 피해자들은 막연한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고 비로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상실에 대한 애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 필요들이 얼마나 충족되었을까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 처벌과 대책 마련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통령의 7시간은 아직도 미스테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단식투쟁 앞에서 폭식투쟁을 하고야마는 잔인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기에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때 이미 예견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안전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공허해지고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의 5.18이 폭도들의 국가전복시도라는 오명을 벗고 민주화항쟁으로 그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견뎌야 했던 치욕의 세월과 진실규명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들이 있었던 것처럼 세월호도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바로 세워질 때까지 그 기억과 노력들을 멈추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 봅니다. 그래야만 세월호 유가족들과 생존자들이 참사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람은 언제나 당신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항상 따사로운 햇살이 비추길.” - 아일랜드 켈트족 기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