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마 파시(Prima Facie)라는 연극을 보았습니다. 호주의 인권변호사 출신인 극작가 수지 밀러(SuzieMiller)의 희곡으로 인터미션 없이 2시간을 여배우 혼자 전체 무대를 끌고 나가는 1인극입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법정 최고의 승부사라 불리는 촉망받는 변호사 테사는 법정에서 오직 승리만을 추구하며, 성폭행 혐의를 받는 의뢰인을 변호할 때조차도 피해자들에게 집요한 반대 심문을 펼칩니다. 그녀는 증인의 진술을 치밀하고 냉정하게 분석해 결국 무죄를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연인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동료 변호사에게 성폭행을 당해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서 782일에 걸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하지만 자신의 피해 정황을 증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법이 피해자를 어떻게 배제하고 2차피해를 발생시키는지, 법적 정의와 실체적 정의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피해자에게 법의 한계와 모순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법에 근거하여’ 깨닫게 됩니다.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법률 용어로, ‘일견(一見) 타당한 증거’, ‘표면상의 진실’ 또는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이나 사실’을 의미합니다. 연극은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피해자의 진술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논리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반증이 나오면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법정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부당함, 법이 표면상의 진실만을 우선시하는 모순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테사는 법정에서조차 자신의 경험이 부정당하고 증거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안전하게 표현하고 존중받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는데 피해자가 소외되고 있는 현실 법정은 피해자에게 그런 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가해자는 자신의행동이 피해자에게 끼친 영향을 알고 책임을 인정하며 재발방지와 피해 회복을 위한 책임을 져야 하는데 현행 법 체계는 가해자의 유무죄만을 판단하는 데 집중합니다. 연극에서도 가해자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게 되고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 했다며 피해자를 비난합니다. 동료들 또한 표면적인 증거, 정황만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당사자들을 판단합니다. 피해자에게 절실한 안전하고 윤리적인 공동체는 부재합니다. 법적 정의는 이루어졌지만 테사는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가해자 또한 돌아가야 할 자리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들은 형식적 정의가 종결된 이후에도 피·가해자로만 남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테사는 이렇게 외칩니다. "오직 내가 아는 건 어딘가, 어느 때, 어떤 식으로든, 무엇인가가 반드시 바뀌 어야 한다는 것!"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바꿔야 합니다!
📝편집인의 글 전문.
목차
[카툰] 서클 이야기
[주제글 1] 저스티스 리터러시 매터스(Justice Literacy Matters) [주제글 2] 멋진 세계는 없다 - 응보적 사회에서 재통합은 가능할까? [주제글 3] 소년사법 체계에서 재통합이 가능해지려면 [주제글 4] 회복적 정의가 말하는 공동체의 비전, 윤리 공동체 [주제글 5] 재통합적 수치심 이론과 회복적 정의
[RJ 뉴스] 회복적 정의와 재통합 [RJ 후기] '범죄피해자가 바라는 검찰개혁' 세미나 후기 [RJ 실천] 제주소년원 회복적정의 프로그램 [RJ 에세이] 내가 만난 회복적 정의
[RJ 연구자료] 회복적 정의의 전환적 실천을 위하여 [RJ 연구자료] 회복적 양의 탈을 쓴 응보적 늑대
[연재1] 피해의 회복과 피해자의 목소리 [연재2] 사회적 참사 앞에서 '회복적 정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