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에 바란다 - 회복적 정의 실현을 위한 교육 및 사법 정책 전환에 대한 입장문 작년 겨울부터 한국 사회는 갑작스런 혼란과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일상이 파괴되고 경제가 무너지는 고통이었습니다. 12.3 내란으로 야기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기 위한 대통령선거가 다가왔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 사회가 겪었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고 정의가 회복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엄중한 전환점을 맞아 회복적정의협회는 새롭게 시작될 정부에서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이 사회의 여러 영역에 공유되고 그 실천이 확산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사법화 현상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 영역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해 버렸고, 오히려 사법이 정치를 결정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검찰총장 출신으로 국민의 정의실현 기대를 안고 탄생했던 윤석열 전 정부에서 국민의 가장 큰 지탄과 불신의 대상이 된 분야가 바로 사법분야라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그는 본인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무를 포기하고 국민의 뜻을 외면한 채, 불법적 계엄이라는 폭거를 시도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폭거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남았습니다. 다행히 국민의 저항과 국회의 신속한 조치로 계엄은 해제되었고 대통령은 탄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법부의 이례적인 판단이 가져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권력자들에 휘둘리는 사법이 민주주의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응보사법의 정의 패러다임이 만들어 낸 '처벌만 피하면 된다'는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문화가 사회에 만연해지고 있음을 우려하게 됩니다. 교육 영역의 사법화도 갈수록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이 아직 충격으로 남아 있는 상황에서, 최근 제주의 한 중학교 선생님이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폭력적 민원이 교육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은 2012년 졸속적인 2.6대책 이후 촉발된 교육의 사법화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교 내 갈등과 분쟁이 교육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사법적 방식에 의존하게된 것은, 학교폭력 문제를 엄벌주의로 다스리려는 응보적 정의 관점이 학교폭력 문제대응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학교는 점점 교육기관이 아니라 사법기관처럼 변하였습니다. 정부에 의해 적극 권장되었던 학교폭력 신고와 아동학대 신고로 인해 현재 학교 현장은 교육 담론이 아닌 사법 담론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서이초 사건 이후 제정된 이른바 ‘교권보호 5법’에도 불구하고, 신고, 분리, 처벌로 이어지는 현 시스템 속에서 교사들은 여전히 학교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는 부분적인 법적 또는 정책적 보완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회 속에 관계와 공동체성을 약화시키는 기존의 사법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법이 필요합니다. 이는 정치와 교육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웃 간 갈등, 청소년 범죄, 중대재해, 차별 문제 등 우리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새 정부는 시작부터 내란 사태를 기획하고 실행한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 사회공동체가 피로 일군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군대를 동원해 유린하려 했던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이 심판은 불의(不義)에 대한 강력한 집단적 불수용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고, 동시에 잘못을 바로 잡음으로써 시작되는 공동체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법이 더 이상 처벌권의 남용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괴롭히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사법체계를 개혁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법개혁은 단지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고 분산하여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기능적 개혁을 넘어, 피해자와 사회공동체의 필요에 관심을 갖고 진정한 책임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철학적 지향과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회복적 정의가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과도한 사법화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 삶의 일상적 갈등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가해자에 대한 강제적 처벌 중심이 만들어 놓은 고의적 책임회피가 아닌 피해회복을 위한 자발적 책임 중심으로, 형식적인 사법 절차가 아닌 공동체와 당사자 간의 대화를 통한 해결 방식이 중심이 되는 회복적 정의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회복적 정의는 기존 형사사법 체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엄벌주의만으로 사회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담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습니다. 일상 영역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분쟁에까지 형사사법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공동체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국민의 주권을 사법체계에 넘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과 학교, 마을, 병원, 직장 등 우리 삶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공동체 중심의 문제해결 방식을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가의 사법체계는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고, 문제 해결의 일차적 접근은 구성원 간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을 정착시켜야 합니다.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회복적 정의가 학교폭력 예방, 청소년 범죄 대응, 공동체 분쟁 해결 등에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학교, 교육청, 경찰청, 법원, 시민사회 등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회복적 실천이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는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기반과 국가적 지원, 법적 체계가 여전히 부족합니다. 정부 차원의 명확한 정책 방향 없이 민간이나 일선 현장에만 맡겨진 회복적 실천은 지속성과 확장성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 정부에서는 국민의 일상과 안전을 국가가 함께 책임지는 ‘기본사회’ 실현의 핵심 전략에 회복적 정의 개념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새 정부가 학교폭력 대응체계를 교육적으로 전환하길 바랍니다.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회복적 공동체가 학교 내에 조성되고, 이를 위한 회복적 생활교육 인프라가 구축되길 희망합니다. 또한, 청소년 사법 절차가 회복적 방식으로 전환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교육과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정부, 입법기관, 교육당국, 그리고 지역사회가 처벌과 배제 중심의 접근에서 벗어나, 회복과 책임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정부가 응보적 정의 패러다임이라는 모노렌즈의 한계를 극복하고 좀 더 인간적이고 공동체적인 균형잡인 정의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데에 노력해주길 기대합니다. 그 여정에 회복적 정의 운동도 함께 나름의 역할과 노력을 함께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한 표가 가져올 회복적 미래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는 향후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회복적정의 관련 정책을 제안할 예정입니다. 2025년 6월 2일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 |